정보쌤의 실험실 | 베타버전 선생님
솔직히 블록 코딩이 훨씬 편하다.
아이들도 쉽게 따라오고, 수업 진행도 매끄럽고, 불평도 없다.
그런데 파이썬을 선택했다.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변수에서 막히고, 연산자에서 포기하고, 옆 친구 화면만 구경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맞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정보 시간에 타자 연습을 안 하는 이유
잘 모르시는 분들은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정보 수업에서 타자 연습이나 엑셀, 이메일 보내는 법 같은 걸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한다. 절대로.
타자 연습, 엑셀, 이메일 보내기, 회원가입 하는 법 — 이것들은 유튜브 영상 하나로 배울 수 있다. 검색 한 번이면 된다. 굳이 학교 수업 시간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필요하면 알아서 잘 하게 되어있다. 게임하고 싶으면 바로 회원가입 하게 되고. 게임하다가 화가 나면 타자 속도도 저절로 빨라진다.
정보 수업 시간은 검색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문제를 쪼개는 것, 조건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컴퓨터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 — 이건 영상 한 편으로 되지 않는다. 반복해서 직접 해봐야 생기는 감각이다.
블록 코딩으로는 부족하다
엔트리나 스크래치는 훌륭한 입문 도구다. 블록을 끼워 맞추며 조건문·반복문 개념을 배우는 데 이만한 게 없다.
하지만 벽이 있다.
블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블록이 없으면 구현을 못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무에서 블록 코딩을 쓰는 사람은 없다.
더 큰 문제는 블록에 너무 익숙해지면 텍스트 코딩으로 넘어올 때 오히려 저항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가 이 전환을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시기다.
마인크래프트를 끌어들인 이유
파이썬을 처음 배우는 중학생에게 print("hello")는 너무 심심하다.
코드를 짜도 결과물이라고는 까만 화면에 글자 몇 개. 재미를 붙이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그래서 마인크래프트 에듀케이션을 끌어들였다. 같은 파이썬 코드인데 눈앞에서 벽이 쌓이고, 건물이 지어지고, 캐릭터가 움직인다. 아이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하지만 마인크래프트는 수단이었다. 목적은 처음부터 파이썬이었고, 그 이유는 따로 있다.
요리사도, 경찰도 파이썬이 필요하다
"그래도 저는 요리사가 될 건데요."
요즘 요식업은 데이터로 돌아간다. 어떤 메뉴가 언제 잘 팔리는지, 식재료 원가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리뷰 데이터에서 패턴을 읽는 것 — 이걸 아는 요리사와 모르는 요리사는 매출이 다르다.
"저는 경찰이 되고 싶어요."
이미 경찰청은 AI 기반 수사 시스템을 쓴다. CCTV 분석, 범죄 발생 패턴 예측, 데이터 기반 수사 —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경찰과 그냥 결과만 받아보는 경찰은 완전히 다른 수사를 한다.
직업이 뭐든 상관없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활용하는 능력 — 이게 앞으로 모든 직업의 기본 역량이 된다.
파이썬은 데이터 분석 도구가 아니다
오해가 많은 부분이다. 파이썬을 배우는 이유가 데이터 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본질은 세 가지다.
논리적 사고력.
코드는 절대 애매하게 쓸 수 없다. 조건이 맞으면 이것, 아니면 저것 — 이렇게 생각하는 훈련 자체가 어떤 직업에서도 통한다.
AI를 제대로 쓰는 능력.
"알아서 해줘"가 아니라 "이 조건에서 이렇게 해줘"로 시킬 수 있는 사람 — 그게 컴퓨팅 사고력이 있는 사람이다. 같은 AI 도구를 써도 결과가 달라진다.
자동화 감각.
반복적인 일을 보면 "이거 줄일 수 있겠는데?" 하는 감각이 생긴다. 경찰이든 요리사든 회계사든, 이 감각 하나가 업무 효율을 완전히 바꾼다.
21세기의 기본 문해력
흔히 3R이라고 부르는 읽기·쓰기·셈하기를 배우는 이유가 "작가나 수학자가 되려고"가 아닌 것처럼, 파이썬을 배우는 이유도 "개발자가 되려고"가 아니다.
엑셀을 모르면 어떤 직장에서도 불리했던 시대가 있었다. 앞으로는 프로그래밍 기초를 모르면 불리한 시대가 온다.
중학생 때가 그 전환점이다. 추상적 사고가 가능해지는 시기, 진로를 아직 열어둔 시기, 그리고 입시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 마지막으로 여유 있는 시기.
변수에서 막히는 아이를 볼 때마다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하는 건, 그 아이가 10년 후에 어떤 직업을 갖든 — 이 경험이 쓸모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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